한국 과학의 과제, 투자액보다 ‘몰입의 시간’
핵심 요약
한국은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중이 세계 2위지만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아직 없다.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은 장기 지원과 연구 자율성, 실패를 감내하는 평가 체계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지역 연구 거점과 국제 학술 네트워크를 함께 강화해야 세계적 성과가 축적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2024년 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중은 5.13%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지만,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아직 없다.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은 이 간극을 예산 부족이 아니라 연구자가 한 가지 질문에 장기간 몰입하기 어려운 생태계의 문제로 진단했다. 현재의 환경이 향후 20~30년 뒤 과학 경쟁력을 좌우하는 만큼 노벨상은 단기 정책 목표가 아닌 연구 축적의 결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 원장이 취임 과정에서 만난 석학 350여 명은 연구비를 확보하느라 연구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고충을 주로 제기했다. 정부 예산이 배정된 분야를 좇는 구조와 논문·특허 건수 중심의 평가는 실패 위험이 큰 질문에 대한 도전을 위축시킬 수 있다. 그는 연구비를 무기한 보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짧은 성과를 반복해서 요구하지 않고 연구자가 의미 있는 문제를 끝까지 발전시키도록 장기 지원과 자율성을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자연과학 분야에서 배출한 수상자는 25명이며 역대 전체 수상자는 29명이다. 정 원장은 이를 현재 환경의 우열보다 약 30년 전부터 쌓인 연구 기반의 결실로 해석했다. 1997년 창의적연구진흥사업과 1999년 국가지정연구실 사업은 젊은 연구자에게 장기간 연구비와 자율성을 제공한 국내 사례로 꼽았다. 일부 대학에 역량을 집중하기보다 잠재력 있는 연구자를 소속과 지역에 관계없이 지원하고, 지역 연구팀과 기반 시설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전국 단위 연구 거점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국내 성과가 세계 학계에서 후속 연구와 인용, 국제학회, 공동연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검증되는 통로도 과제로 제시됐다. 한림원은 국내 연구자를 해외 권위 학술상 후보로 추천하되 국제 관행에 따라 대상과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 원장은 국제학술상과 연구 네트워크를 넓히는 한편 새로운 분야 개척, 젊은 연구자 양성, 후속 연구의 지속성을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고 봤다. 실패 속에서도 지식과 인재가 남는 연구를 인정하고, 인공지능 시대에도 연구자 고유의 질문을 이어갈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