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 시대, 진실의 출발점은 자기성찰
핵심 요약
탈진실 시대의 진실 회복은 자신도 거짓에 빠질 수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은 타인을 거짓말쟁이로 규정하는 판단이 자기모순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지혜가 함께 요구된다.
거짓이 일상과 정치의 언어에 깊숙이 들어온 탈진실 시대에는 상대의 오류를 지적하는 일만으로 진실에 다가가기 어렵다. 누구든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사실을 외면할 수 있다는 자기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 자신 역시 ‘인식론적 크레타인’일 수 있음을 인정할 때 진실을 둘러싼 대화도 비로소 출발할 수 있다.
신약성경 디도서 1장 12절에는 크레타 출신 예언자가 자기 민족을 두고 늘 거짓말하며 악한 짐승처럼 게으르고 탐욕스럽다고 평한 대목이 나온다. 바울이 인용한 이 말은 후대 철학에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로 다뤄졌다. 발화자도 크레타인이므로 그 진술이 참이라면 스스로 거짓말한 셈이 되는 모순이 생긴다.
옥스퍼드 사전은 2016년 ‘포스트트루스’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선거 승리 과정에서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부각된 시기였다. 약 10년이 흐른 지금 탈진실은 특정 집단의 문제를 넘어, 다른 의견을 비도덕적으로 규정하고 보고 싶은 정보만 진실로 받아들이는 일상의 태도로 번졌다.
거짓과 사실의 경계마저 무의미해지는 ‘포스트폴스후드’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자기 확신을 더 큰 목소리로 반복하기보다 누구나 거짓에 가담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반대편을 공격하기 전에 자신의 믿음과 태도를 점검해야 한다. 니체가 진실을 말하는 일이 드문 시대를 언급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이 거짓을 알고 있거나 믿는 사람만 거짓말할 수 있다고 본 관점은, 진실을 향한 용기와 거짓을 성찰하는 지혜가 함께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