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속 숨은 가정, 답변을 옭아매다
핵심 요약
질문에 숨은 전제는 어떤 답을 택해도 이미 정해진 사실처럼 남을 수 있다. 후회와 인정은 부정했을 때 작동 방식이 다르며, 잘못이나 행위의 존재를 둘러싼 판단도 달라진다. 답변에 앞서 문장 속 가정을 살피고 필요하면 전제 자체를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질문은 겉으로 예와 아니요 가운데 하나를 고르게 하지만, 문장 안에 미리 깔린 가정까지 답변자가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다. 전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이미 사실로 합의한 내용처럼 작동한다. 단순한 사실은 부정할 수 있어도 질문에 숨어든 전제는 어느 쪽으로 답하든 그대로 남기 쉽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물건을 훔친 일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는 절도 행위가 있었다는 가정이 먼저 들어 있다. 후회한다고 답하면 행위를 시인한 모양이 되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도 훔쳤다는 전제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반면 잘못을 인정하느냐는 물음에 인정하지 않는다고 답하면 잘못이 없었다는 주장을 펼칠 수 있어, ‘후회하다’와 ‘인정하다’는 부정했을 때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
이 차이는 잘못을 확신한 판사가 피고인에게 후회 여부를 묻는 상황에서 선명해진다. 후회한다고 하면 잘못을 받아들인 답으로 해석될 수 있고, 아니라고 하면 반성하지 않는 태도로 읽힐 수 있다. 두 선택에서 벗어나려면 잘못한 사실이 없으므로 후회할 대상도 없다고 전제부터 거부해야 하지만, 갑작스러운 질문 앞에서 이런 대응을 곧바로 내놓기는 쉽지 않다.
흡연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담배를 끊었느냐고 묻는 사례도 같은 구조다. 끊었다는 답에는 과거 흡연이, 끊지 않았다는 답에는 현재 흡연이 각각 따라붙는다. 처음부터 담배를 피우지 않아 끊을 일도 없었다고 밝혀야 두 가정을 모두 벗어날 수 있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는 이처럼 질문에 포함된 전제가 답변의 범위를 제한하고 뜻하지 않은 동의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