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사라진 자리, 스티븐스가 남긴 질문
핵심 요약
김희경 작가는 직업이 개인의 정체성과 사적인 삶을 잠식하는 문제를 돌아봤다. ‘남아 있는 나날’의 스티븐스는 집사의 소명에 자신을 가두며 사랑과 판단 능력을 잃어간다. 은퇴 이후의 삶을 앞둔 세대에 일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 질문을 던진다.
김희경 작가는 직업이 한 사람의 표정과 태도, 말투와 정체성까지 잠식할 수 있다는 문제를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통해 짚었다. 기자로 일하던 30대 후반, 직업이 겉모습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사람은 노동으로 망가진 것이라는 김훈의 말을 접한 경험이 출발점이다. 그는 당시 자신에게서 일을 제외하면 어떤 사람이 남는지 선명하게 그리지 못해 당혹감을 느꼈다고 돌아봤다.
소설의 주인공 스티븐스는 영국 대저택에서 30여 년간 집사로 일하며 ‘위대한 집사’가 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더 나은 세상에 기여하는 신사를 섬기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고, 어떤 상황에서도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능력을 품위로 규정한다. 그러나 직업적 자세를 지키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적인 감정을 말하고 표현하는 능력은 굳어갔고,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총무 켄턴 양에게도 끝내 마음을 열지 못했다.
직업과 자신을 동일시한 태도는 판단과 관계까지 왜곡한다. 스티븐스는 노쇠한 아버지가 업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켄턴 양의 지적에 맞서다가 사고가 난 뒤에야 아버지를 식사 시중에서 제외한다. 전문가의 품위를 앞세웠지만 실제로 지키려 한 것은 대를 이은 위대한 집사라는 사적 명예였다. 평생 섬긴 달링턴 경의 나치 동조가 드러난 뒤에도 그의 행적을 거듭 방어한 행동 역시 자신의 선택과 생애 전체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려는 자기합리화로 나타난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스티븐스는 낯선 노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놓쳐버린 사랑과 자기 삶을 잠시 돌아본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일이 이어지는 저택으로 돌아가 새 주인을 기쁘게 할 유머를 익히겠다고 다짐한다. 작품 제목은 하루의 남은 시간이면서 동시에 인생의 남은 날을 가리킨다. 오랫동안 직업인으로 살아온 세대가 잇따라 은퇴하는 시점에서, 일이 빠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는 더 이상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다. 스티븐스의 노후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 삶이 맞을 수 있는 결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