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 하나가 바꾸는 번역의 의미 지도
핵심 요약
‘번역의 철학’은 번역의 불가능성 속에서 두 언어와 문화를 잇는 번역가의 고민을 다룬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Herkunft’의 번역 제목은 주어 선택이 작품의 의미와 독자의 시선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번역가는 원문에서 덜어낼 것과 남길 것을 판단하며 원저자와 독자를 잇는 의미의 지도를 만든다.
데이미언 설스의 책 ‘번역의 철학’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길 때 번역가가 마주하는 선택과 한계를 짚는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는 끝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믿음과, 한 언어로 타인을 대신해 말할 수 있다는 믿음이 번역의 경계에서 맞선다. 번역가는 이 불가능성의 간극을 통과하며 원저자와 독자가 만날 길을 만든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번역 과정에서 제목의 의미가 달라지는 사례를 보여준다. 이탈리아어판 제목 ‘Non dico addio’를 직역하면 ‘나는 작별을 말하지 않는다’가 된다. 원제에 없던 1인칭 주어가 등장하고 선언적인 문장은 고백에 가까운 표현으로 바뀌었다. 폴란드어판과 스웨덴어판, 체코어판 제목에도 모두 ‘나’가 주어로 들어갔다.
이때 ‘나’가 경하인지 정심인지, 작별하지 않으려는 대상이 정심인지 과거의 비극 자체인지는 하나로 단정하기 어렵다. 설스가 영어로 옮긴 사샤 스타니시치의 소설 ‘Herkunft’도 비슷한 문제를 드러낸다. 독일어 원제는 ‘출신’ 또는 ‘기원’을 뜻하며 주어가 없지만, 영어판은 ‘Where You Come From’으로 정해졌다. ‘I’나 ‘One’ 대신 ‘You’를 택해 독자가 자신의 출발점을 생각하도록 했다.
번역가는 어떤 단어를 현지화하거나 낯선 모습으로 남길지, 문장을 직역하거나 전체 의미를 살릴지를 판단한다.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보존하느냐에 따라 원문의 각도와 방향도 달라진다. 이 작업은 텍스트의 경계를 다시 나누고 골목을 지우거나 물길을 내는 ‘의미의 지도’ 제작과 닮았다. 그렇게 흰 종이 위 검은 활자로 놓인 길은 원저자의 문장과 독자를 연결하며 새로운 세계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