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휴전 구상, 불신과 충돌로 좌초
핵심 요약
김익렬과 김달삼은 1948년 4월 말 전투 중지와 순차적 무장해제에 합의했다. 오라리 방화와 귀순 주민 공격이 이어지면서 협상은 불신 속에 무너졌다. 김익렬의 평화적 수습 시도와 부대 지휘 책임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렸다.
1948년 제주 4·3사건 진압에 투입된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4월 말 인민유격대 책임자 김달삼과 두 차례 접촉해 전투 중지와 무장해제를 협의했다. 경찰과 주민의 충돌로 사태를 인식한 김익렬은 군사 진압보다 평화적 수습을 택했지만, 9연대 안에는 오일균·문상길·이윤락 등 남로당 조직원이 침투해 작전 정보 유출과 교전 회피를 주도하고 있었다.
김익렬의 회고에 남은 두 번째 회담은 4월 28일 또는 30일 구억국민학교에서 열렸다. 두 사람은 72시간 안에 전투를 멈추고 5일 이후의 교전을 합의 위반으로 간주하며, 무장해제를 순차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김달삼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추방, 제주도민 중심의 경찰 편성, 참여자 전원의 신변 보장을 요구했다. 김익렬은 지도부 처벌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귀순을 성사시키면 해외 탈출을 개인적으로 돕겠다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협상 직후 양측에서는 상대가 시간을 벌거나 귀순자를 제거하려 한다는 의심이 확산됐다. 5월 1일 오라리에서는 우익단체 청년들이 좌익 청년들의 집 12채를 불태웠고, 뒤이어 내려온 인민유격대가 주민을 살해했다. 5월 3일에는 귀순 의사를 밝힌 주민 200~300명이 제주비행장으로 이동하다 무장대의 공격을 받았다. 생포된 공격자들은 경찰 소속이라고 주장했으나 조사 과정에서 경찰로 위장한 인민유격대원으로 확인됐다.
김익렬은 5월 5일 제주중학교 대책회의에서 오라리 습격 주체가 경찰이라고 주장하다 조병옥 경무부장과 충돌했고, 이튿날 연대장에서 해임됐다. 후임 박진경은 진압 성과를 냈으나 6월 18일 연대 내 남로당원들에게 암살됐다. 김달삼은 8월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참여했고, 김익렬은 무혐의 처분 뒤 군단장까지 지냈다. 김익렬이 끝까지 4·3을 민중폭동으로 본 점과 부대 내 남로당 조직을 파악하지 못한 책임을 둘러싼 평가는 이후에도 엇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