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영광 걷어낸 ‘오디세이’, 폭력의 기원을 비추다
핵심 요약
‘오디세이’는 거대한 제작 규모를 절제된 공간과 인물 묘사로 풀어낸다. 영웅 신화 뒤에 숨은 조작과 희생을 트로이 목마 작전을 통해 드러낸다. 문명의 탄생에 내재한 야만을 AI와 탈진실의 시대 전환과 연결한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오디세이’는 대규모 제작의 외형과 달리 절제된 실내극에 가까운 작품으로 그려진다. 트로이는 거대한 도시보다 황량한 공간으로 제시되고, 해변의 그리스군도 고립된 수십명의 무리처럼 보인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장면 역시 장관을 과시하지 않는다. 수백명의 연주자를 동원한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를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거대한 실내악에 빗댄 역설과 닮은 구성이다.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도 기존 영웅 서사와 거리를 둔다. 앤 해서웨이와 샬리즈 세런은 성애화되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하며, 키르케는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가 아니라 탐욕에 혐오를 느껴 그들을 돼지로 만드는 인물로 바뀐다. 아가멤논과 트로이 병사들을 비롯한 남성들은 투구 뒤에 얼굴을 감추거나 익명으로 남는다. 남성의 위업을 전면에 세우고 여성을 배경으로 밀어낸 ‘일리아스’의 질서가 영화에서는 뒤집힌다.
영화는 트로이 목마의 승리를 영웅적 기지로 미화하지 않는다. 목마 속 전사들은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몸에 배설하며 며칠을 버틴다. 오디세우스는 젊은 병사 시논에게 목마가 화해의 선물이라고 믿게 한 뒤 트로이인들을 설득하도록 보낸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 병사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과 시논이 살해될 운명을 감춘 것이다. 신화를 낯설게 만드는 이 장면은 새 질서의 출발점에 조작과 희생이라는 범죄가 놓였음을 드러낸다.
청동기 시대의 명예 질서가 거짓과 술수를 거쳐 고전기 그리스로 넘어가는 과정은 AI와 탈진실의 시대로 이동하는 오늘과 겹쳐진다. 아도르노가 오디세우스를 욕망을 억누르고 지배를 얻는 부르주아적 주체로 해석한 데서 더 나아가, 영화 속 희생은 포기를 강요하며 가학적 쾌락을 얻는 충동으로 읽힌다. 마지막에 오디세우스는 죽음으로 내몬 병사들을 기리려 서쪽으로 떠난다. 작품은 옛 영광의 복원이 아니라 문명이 야만 위에서 태어나는 순간과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