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서 지워진 몸, 원형 화면에 돌아오다
핵심 요약
함양아 개인전이 재난·기아·노동·AI의 거대 담론을 개인의 몸과 감정으로 되돌린다. 8채널 원형 영상은 한 사람의 생애와 반세기 세계사를 겹치며 관객의 제한된 시야를 드러낸다. 여러 사람의 독백은 숫자와 사건 기록에서 빠진 감정을 복원하는 동시에 고통의 소비 가능성을 묻는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아트선재센터에서 함양아 개인전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가 10월 4일까지 열린다. 전시는 재난과 기아, 노동, 인공지능처럼 거대한 체계가 개인의 몸과 감정에 남기는 흔적을 살핀다. 2018년부터 이어진 동명 프로젝트의 신작과 주요 작품을 모아, 숫자와 연대기로 정리된 사회 문제를 구체적인 삶의 장면으로 되돌린다.
신작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4.0’은 화장한 사람의 재가 바다에 흩어지는 장면에서 출발해 시간을 장례에서 출산 방향으로 거슬러 올린다. 냉전 종식과 금융위기, 팬데믹, 인공지능의 부상이 한 사람의 생애와 22분짜리 8채널 영상에 포개진다. 관객은 2층 원형 구조물 안에서 360도 화면을 마주하지만, 한 장면을 보는 사이 등 뒤에서 진행되는 다른 사건은 놓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 시스템의 붕괴가 개인에게 무엇을 남기는지 질문해 온 작업은 ‘잠’과 ‘주림 2.0’에서도 이어진다. ‘잠’은 재난 때 체육관이 대피소이자 임시 숙소, 관리 공간으로 바뀌며 보호와 감시의 경계가 흐려지는 모습을 담는다. ‘주림 2.0’은 수억 명이 굶는 동안 가정과 식당·소매점에서 해마다 10억t이 넘는 음식이 버려지는 현실을 통해 주림을 총량 부족이 아닌 구매력과 운송 체계, 안전하게 먹을 권리의 문제로 제시한다. 지난 20년간 세계 소득에서 노동자 몫이 줄고, AI의 수익과 기술이 일부 기업과 국가에 집중되는 현실도 함께 다룬다.
3층의 ‘듣는 화자, 말하는 타자’에는 가자지구를 떠난 팔레스타인 여성과 폭염을 견디는 청년, 생태 연극을 하는 예술가가 휴대전화로 남긴 독백이 여러 화면에 펼쳐진다. 사건과 날짜에 담기기 어려운 두려움과 감정을 공동의 기록으로 잇는 작업이다. 동시에 전시는 증언이 전시장 안에서 소비되거나 서로 다른 비극이 하나의 장대한 이미지로 평평해질 가능성도 드러낸다. 원의 중심에 선 관객에게 남는 것은 세계를 완전히 보았다는 확신이 아니라, 보지 못한 장면을 향해 몸을 돌려야 한다는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