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장벽 앞에 선 농민 이경해
핵심 요약
이경해는 2003년 9월 10일 캉쿤 WTO 각료회의 현장에서 농산물 개방에 항의하며 자결했다. 농어민후계자와 ‘올해의 농민’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수입 농산물 확대로 목장을 잃은 뒤 농민운동에 나섰다. 한국이 세계화의 혜택을 누린 20여 년 동안 농가 인구와 식량 자급률은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농산물 시장 개방에 맞서온 농민운동가 이경해는 2003년 9월 10일 멕시코 캉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현장에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시위대 앞을 막은 바리케이드에 올라 “대량 수입 이후 우리 소농은 생산비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세계무역기구가 농민을 죽인다”고 항의한 뒤 준비한 칼로 자결했다. 수첩에는 육신은 떠나도 영혼은 계속 지켜보겠다는 뜻의 글이 남아 있었다.
1947년 8월 7일 태어난 이경해는 서울에서 공부한 뒤 전북 고향으로 돌아가 버려진 산지를 목장으로 일궜다. 1980년대 농어민후계자로 주목받았고, 1989년 유엔 식량농업기구의 ‘올해의 농민’ 표창을 받으며 농업의 미래를 이끌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호주산 쇠고기 수입 이후 소값이 떨어지면서 목장은 문을 닫았다. 그는 1990년 농산물 세계화 협상이 진행되던 스위스 제네바에서 자결 항의를 시도했으나 목숨을 건졌다.
이경해는 1991년 전북도의회 의원에 당선돼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1994년과 2000년에는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 사이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쌀 시장을 부분적으로 개방했고, 1995년 세계무역기구가 출범했다. 한국은 제조업 시장 확대의 기회를 얻는 대신 농업 시장을 내주는 방향으로 세계화에 편입됐다. 이경해는 2003년 2월과 3월에도 제네바의 세계무역기구 본부를 찾아 단식하며 농산물 개방에 반대했다.
캉쿤에서의 죽음은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국제 농민운동 조직은 그가 숨진 9월 10일을 국제행동의 날로 정했다. 그러나 당시 참여정부의 농업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은 세계화의 주요 수혜국 가운데 하나가 됐지만, 같은 기간 농가 인구와 식량 자급률은 모두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경제 성장의 이면에서 농촌의 자생력과 자긍심이 치른 대가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농업 개방의 상징적 사건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