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저항이 확산되지 못한 이유
핵심 요약
북한에서는 수용소와 군부, 시장을 중심으로 여러 저항과 권력 교체 시도가 제기됐다. 주민들은 집단 항의뿐 아니라 단식, 동원 거부, 재산 훼손, 낙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맞섰다. 이동·통신 통제와 일상적 감시, 가족까지 겨냥한 처벌이 저항의 조직화와 확산을 차단한다.
북한 주민의 저항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1987년 5월 온성군 창평의 12호 수용소 탄광에서는 동료 수감자를 구타하던 경비원을 한 수감자가 살해한 뒤 수백 명이 가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항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대에 진압됐다. 다만 폐쇄된 북한의 특성상 일부 사건은 저항을 억제하려는 정권의 선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군 내부의 권력 교체 시도도 잇따라 제기됐다. 소련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파 장교들은 1992년 4월 25일 김정일 제거를 모의한 혐의로 고위 지휘관 약 70명이 숙청된 것으로 전해진다. 1993년 3월 함흥 7군단에서는 장교 약 30명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반란을 준비하다 체포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1995년 또는 1996년 6군단 봉기 계획이 적발돼 장교 약 40명이 처형되고 300여 명이 중형을 받았으며, 부대는 9군단으로 개편된 것으로 알려졌다.
생활 현장의 집단행동도 이어졌다. 1993년에는 굶주린 주민들의 폭동이 있었다는 탈북 장교의 증언이 공개됐다. 2008년 해주에서는 시장 출입 연령 제한에 맞선 여성 9명이 좌판을 펴고 관리자들과 충돌했으며, 이후 장사가 용인됐다. 청진 여성 상인들도 좌판 철거에 항의했다. 2009년 11월 30일 화폐 조치로 가계의 교환액이 제한되고 저축이 사라지자 대규모 항의가 벌어졌다. 당국은 이례적으로 사과했고 박남기 노동당 재정 책임자는 2010년 3월 공개 처형됐다. 이후 주민들은 중국 위안화와 미국 달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1년 청송·신의주·청주·용천·선천과 2015년 함흥·청진·무산에서도 시장 관련 봉기가 기록됐다. 수감자들은 단식과 규칙 거부, 경비원과의 충돌로 맞섰고 주민들은 관리 폭행, 국가 재산 훼손, 생산량 고의 미달, 동원 불응과 뇌물을 통한 사상학습 회피를 택했다. 2016년에는 포천·청진·회령에서 김정은 타도를 요구하는 전단과 낙서, 문구가 적힌 5천원권이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왔고, 2023년 12월 량강도 보성리에서는 당의 지시를 조롱하도록 집단농장 표어가 고쳐졌다. 그러나 정당·노조·언론과 독립단체가 금지되고 지역 이동, 국제전화와 인터넷이 통제되는 데다 감시조직·자아비판·밀고망이 일상을 압박한다. 정치범은 국가보위성과 사회안전성의 수사·단속을 거쳐 수감, 공개 처형, 정치범수용소 수용에 처할 수 있고 가족도 처벌받아 저항이 조직적으로 확산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