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등장한 ‘AI 책임론’…입증 실패로 잇단 유죄
핵심 요약
범행과 영상 증거를 AI 탓으로 돌린 피고인들의 주장이 법정에서 잇따라 배척됐다. 이메일 전송과 살인 예고, 폭행 사건에서 구체적인 AI 관여 또는 조작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AI 관련 항변에는 과학적 근거가 필요하며 수사기관도 보강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람이 저지른 범행이나 불리한 영상 증거를 인공지능의 작동 또는 조작 탓으로 돌린 피고인들의 주장이 법정에서 잇따라 배척됐다. 재판부는 AI가 범행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작동 과정과 객관적·과학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놨다. 생활 속 AI 활용과 함께 처벌을 피하려는 이른바 ‘AI 책임론’도 형사재판에 등장한 모습이다.
2023년 피해자에게 성관계 영상 캡처 등을 담은 이메일을 103차례 보낸 혐의로 기소된 A씨 측은 휴대전화 AI 프로그램의 오작동으로 이메일이 발송됐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그러나 AI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증명하거나 법정에서 시연하지 못했다.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4단독 이범용 판사는 2025년 2월 A씨에게 벌금 500만원 등을 선고했다. 2024년 인터넷 커뮤니티에 살인 예고 글을 올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B씨 측도 협박 피해자로 지목된 댓글 작성자가 AI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전지법 천안지원 형사1부는 댓글 반응과 익명 커뮤니티의 특성을 고려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상 증거가 AI로 조작됐다는 항변도 유죄 판단을 뒤집지 못했다. C씨는 2024년 6월 18일 길에서 흡연 중인 자신을 촬영한 사람을 폭행한 뒤 해당 영상이 AI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으나 이를 입증하지 못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단독 조영민 판사는 2025년 7월 15일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경찰관을 폭행하는 장면이 엘리베이터 CCTV에 담긴 D씨 역시 AI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수원지법 안산지원 형사8단독 심우정 판사는 피해 경찰관의 진술 등을 토대로 유죄로 판단했다.
곽준호 법무법인 청 대표변호사는 AI가 범행을 대신했거나 상대방이 AI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주장이 인정되지 않으며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영상 증거를 부인하는 피고인에 맞서 수사기관도 보강 입증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 출신 조용우 법무법인 더킴로펌 대표변호사는 피고인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교통카드 이용 내역과 같은 추가 증거를 세밀하게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