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도심에 남은 10대들의 항일 흔적
핵심 요약
대구 도심 곳곳에 10대 학생과 학승이 참여한 독립운동 현장이 남아 있다. 계성학교에서 대구고보 터까지 만세운동과 태극단·동맹휴학의 흔적이 이어진다. 대구상업학교와 대구고보 터의 안내 시설에는 청소년 독립운동사가 충분히 소개되지 않고 있다.
8월 12일 세계 청소년의 날을 맞아 대구 도심에서 10대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따라가는 답사길을 살펴봤다. 출발점인 중구 대신동 계성학교에서는 1919년 3월 8일과 10일 만세 시위로 투옥된 대구지역 76명 가운데 재학생 35명이 옥고를 치렀다. 당시 15세 이규환을 비롯해 17∼19세 학생들이 고문과 징역형을 감당했다.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아담스관 지하실과 만세운동 기념탑을 본 뒤에는 대구읍성 성돌이 박힌 외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 신명여학교 3·1운동 기념탑과 독립운동 이력을 담은 담장을 둘러보고, 학생들이 경찰을 피해 태극기를 품고 서문시장으로 향했던 90계단을 내려간다. 계산성당 옛 해성학교의 16세 이남숙도 시위 참여로 고문과 실형을 겪었으며 후손과 묘소가 확인되지 않았다.
약전골목과 종로는 3월 8일 시위대의 행진로이자 계성학교 혜성단의 활동 현장이다. 보현사에서는 1919년 3월 29일 동화사 학승 10명이 만세운동을 준비했고, 이 가운데 김문옥·김윤섭·이보식은 19세, 이성근·박창호는 18세였다. 이들은 이튿날 덕산정시장 시위를 주도한 뒤 고문을 당하고 각각 10개월 동안 옥살이했다.
대구상업학교에서는 1943년 비밀결사 태극단 학생 26명이 구속됐다. 이준윤과 이원현은 병보석 직후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고, 이상호와 윤삼용도 광복으로 풀려난 뒤 목숨을 잃었다. 뒤편 대구고보 터에서는 3·1운동에 참여한 김재소와 김수천이 징역형을 살았으며, 1926년 동맹휴학으로 15명이 퇴학당했다. 1928년에도 182명이 무기정학, 18명이 퇴학, 24명이 실형 처분을 받았지만 두 학교 터의 안내 시설에는 이 역사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