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의 ‘오디세이’, 승리 뒤에 남은 죽음을 묻다
핵심 요약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의 승리보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육과 망각을 조명한다. 신화 속 모험은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 폭력이 초래한 결과로 재해석된다. 아르고스의 20년 기다림은 승리를 기억하면서 신의를 잃은 인간의 모습을 되비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2026)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담보다 승리 뒤에 가려진 살육과 망각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맷 데이먼)는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의 구혼자들을 제압한 뒤, 자신의 계략으로 거둔 전쟁의 승리를 고통스럽게 되짚는다. 트로이 점령 과정에서 신성한 약속이 무너졌고 문명의 종말을 드러낼 폭력이 벌어졌다는 자각이다.
영화는 폴리페모스와 키르케, 사이렌, 거인 괴물, 포세이돈의 공격, 칼립소와 보낸 7년을 단순한 모험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사건들은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 어리석음과 폭력이 불러온 결과로 다시 해석된다. 키르케가 부하들을 돼지로 바꾼 행동은 인간의 무자비함에 대한 반응으로, 제우스의 소를 잡아먹은 일은 신의 자리를 넘보는 무지와 욕망으로 제시된다.
작품이 겨누는 대상은 승자만을 중심에 놓는 역사 인식이다. 1·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한국전쟁을 비롯해 러시아의 침공으로 벌어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수단·미얀마·시리아 내전은 수많은 죽음과 고아, 과부, 장애와 비극을 남겼다. 그러나 승리를 앞세운 기억 속에서 희생자의 고통은 밀려난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에서도 드러난 이 문제의식을 오디세우스의 후회와 탄식으로 확장한다.
결말에서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와 서쪽으로 떠나며, 20년 동안 주인을 기다린 늙은 개 아르고스는 그를 알아보고 꼬리를 흔든 뒤 죽는다. 전쟁과 모험을 거친 영웅보다 한 사람을 잊지 않은 개가 신의를 지킨 존재로 부각되면서 두 존재의 자리가 뒤집힌다. 에스겔서 33장 11절과 로마서 5장 8절·10절에 담긴 회개와 십자가의 의미도 승리 자체보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원수까지 살리려는 태도에 무게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