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못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핵심 요약
디지털 기록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생전 목소리를 보존해 진실을 살피는 단서가 된다. 구술생애사는 사회 안에서 발언 기회를 얻지 못한 노동과 삶을 기록한다. 새의 경고음과 농민의 침묵까지 세심하게 듣는 태도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소설가 김탁환은 세상을 떠난 사람뿐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도 발언의 기회를 얻지 못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혜초가 천축국 여행 뒤 통일신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 전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처럼 확인할 수 없는 질문은 죽음이 남긴 한계를 보여준다. 제물과 노래, 춤, 기도로 망자의 말을 들으려는 시도 역시 그 목소리의 진위를 확정하기 어렵다.
디지털 녹음과 영상은 생전에 남긴 목소리를 오래 보존하며 갑작스러운 죽음의 진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에는 2024년 1월 29일 가자지구에서 숨진 여섯 살 팔레스타인 소녀 힌드 라잡의 긴급 통화가 담겼다. 친척들이 숨진 택시에 홀로 갇힌 힌드는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어머니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며 구조를 기다렸다. 구조 협상 과정에서 이스라엘군도 소녀가 혼자 생존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힌드는 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사살됐다.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산 사람의 생애를 남기는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 노회찬재단의 구술생애사 수업과 책 ‘우리들의 드라마’, ‘우리의 노래가’는 6411번 첫 버스를 타는 노동자들을 조명했던 노회찬의 문제의식을 잇는다. 성소수자와 한국에 거주하는 아시아인, 30년간 하숙집을 운영한 정경애 등의 삶이 기록됐다. 정경애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해마다 남학생 열 명의 식사와 빨래, 청소를 맡았던 고단함과 긍지를 다섯 차례에 걸쳐 박열음에게 들려줬다. 자녀들은 이 이야기가 평생 가사노동을 감당한 이들에게 위로와 긍지가 되길 바랐고, 박열음은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을 계속 살피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람 밖의 생명과 침묵에도 들리지 않던 의미가 있다. 동물언어학자 스즈키 도시타카는 박새가 까마귀를 발견하면 ‘삐-쯔삐’, 뱀을 보면 ‘츠르르르르’라는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며, 새끼들은 각각 둥지 안쪽으로 숨거나 밖으로 탈출한다고 설명한다. 한편 8월 불볕더위 속에서 온열질환 경고가 이어져도 농부들은 농수로의 물을 논에 대기 위해 아침부터 논두렁을 지켰다. 짧은 인사 뒤 이어진 침묵과 긴 한숨은 메마른 논과 농민의 마음을 함께 드러내며, 주변에서 이미 나오고 있던 목소리를 세심하게 들어야 할 필요성을 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