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인권 기준으로 떠오른 ‘돌봄권’
핵심 요약
미주인권재판소가 돌봄을 인간 존엄성 보장을 위한 독립적 인권으로 인정했다. 돌봄권은 돌봄을 받을 권리와 제공할 권리, 자기 돌봄의 권리로 구체화됐다. 한국에서도 돌봄을 사회서비스를 넘어 보편적 기본권으로 정립할 제도 전환이 과제로 떠올랐다.
미주인권재판소가 2025년 8월 돌봄을 인간 존엄성 보장에 필요한 독립적 인권으로 공식 인정했다. 국제 사법기관이 돌봄권을 고유하고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명시한 첫 사례다. 이번 권고적 의견은 2023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요청으로 논의가 시작됐으며, 국제사회에서 129건의 서면 의견이 제출됐다. 재판소는 돌봄을 개인이나 가족의 선의에 맡길 사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과 사회의 지속을 뒷받침하는 보편적 필요로 규정했다.
재판소가 정립한 돌봄권은 돌봄을 받을 권리, 제공할 권리, 자기 자신을 돌볼 권리 등 세 차원으로 구성된다. 아동과 노인, 장애인, 환자와 부상자는 신체적·정신적·영적·문화적 안녕을 위한 충분하고 질 높은 돌봄을 누려야 한다. 특히 장애인과 노인에게는 단순한 보살핌을 넘어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하고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지원해야 한다. 유급·무급 돌봄 제공자 역시 차별 없는 존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으며, 누구나 자신의 안녕을 돌볼 시간과 공간, 자원을 보장받아야 한다.
돌봄 부담의 성별 격차와 사회적 책임도 핵심 쟁점으로 제시됐다. 여성은 성별 고정관념 속에서 남성보다 3배 이상 많은 무급 돌봄노동을 맡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여성의 노동권과 교육권, 사회보장권을 제약해 왔다. 국내총생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무급 돌봄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국가·사회·가정이 책임을 나누는 공동책임 원칙을 구현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유급 돌봄노동자의 동등한 노동권과 무급 제공자를 위한 최소 사회안전망 구축도 국가의 법적 의무로 제시됐다.
이번 의견은 개별 분쟁에 대한 판결과 달리 당사국에 직접적인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으며, 협약 비당사국인 한국에도 곧바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다만 국제인권법 해석에서 규범적 권위를 지녀 각국의 입법과 재판에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 한국은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을 도입했고 2024년 제정된 돌봄통합지원법도 최근 시행했지만, 돌봄은 여전히 특정 집단을 위한 사회서비스와 정책 수혜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보편적 기본권으로의 전환을 위해 헌법상 권리 명시와 돌봄의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는 제도 개편이 과제로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