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비 유학생 안상호, 귀국 불응 끝 교관직 해제
핵심 요약
안상호는 일본 국비 유학 후 귀국 요구에 불응해 대한제국 의학교 교관직에서 해제됐다. 1907년 귀국한 그는 이후 친일단체에 참여하고 피습된 이완용을 치료했다. 증손녀 하영은 증조부의 행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랑처럼 언급했다며 사과했다.
배우 하영의 증조부이자 한국 최초 개업의로 알려진 안상호가 대한제국의 지원으로 일본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한 뒤 정부의 귀국 요구에 응하지 않아 관립 의학교 교관직에서 해제된 사실이 확인됐다. 1905년 1월 21일 발행된 대한제국 관보 3042호에는 여러 차례 전보를 보내 귀국을 요구했지만 안상호가 돌아오지 않아 직위 해제가 불가피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안상호는 1902년 동경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대한제국은 일본 국비 유학생에게 매월 학비와 피복비를 비롯한 체류 비용을 지원했다. 정부는 1904년 귀국 의사를 밝힌 안상호를 의학교 강사로 임명하고 3급 봉급을 책정했으나, 그는 당시 일본에 머물렀다. 기존에는 그가 1904년 귀국해 이듬해까지 의학교 교관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실제 귀국 시점은 직위 해제 후 2년여가 지난 1907년 3월 21일로 확인된다. 같은 해 4월 7일 발행된 대한유학생회회보 제2호에는 안상호가 졸업 후 도쿄 자혜병원에서 수년간 의술을 펼치고 의학 이론을 연구한 뒤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다는 기록이 실렸다. 귀국 후에는 순종 전의와 이왕직 촉탁의를 지냈으며, 한국 최초 양의원을 열었다.
안상호는 1916년 11월 민영기가 회장을 맡아 세운 친일단체 대정실업친목회에도 참여했다. 이 단체에는 이완용·조중응·송병준·이윤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의 공격을 받은 이완용을 치료한 의료진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목숨을 건진 이완용은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하영은 12일 증조부의 과거 행적을 최근 접한 뒤 가족사를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됐다며 사과했다. 가족에게 전해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 증조부의 삶을 알고 있었고, 여러 자리에서 이를 가족의 자랑처럼 언급한 일을 반성한다고 밝혔다. 이어 증조부의 과오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후손으로서 사죄한다며, 광복절을 앞둔 시기에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송구하다는 뜻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