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주권 실현, 노동 조건 재편에서 시작된다
핵심 요약
국민주권의 실질적 구현을 위해 노동하는 시민의 일상적 정치 참여가 과제로 제기됐다. 과도한 업무와 불안정한 노동 조건은 시민의 공론 형성 참여를 제약한다. 노동자의 생계와 사회적 인정을 보장하는 노동 조건 재편이 요구된다.
이재명 정부가 내건 ‘국민주권정부’의 성패는 국민을 명목상의 주권자가 아니라 국정의 뜻을 형성하는 실질적 주체로 대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12·3 내란 사태에서는 시민이 공론을 형성해 윤석열 당시 대통령 탄핵과 새 정부 출범을 이끄는 힘을 보였다. 그러나 위기 상황을 벗어난 일상에서도 이러한 정치 참여가 지속되려면 국민 다수가 처한 노동 조건부터 재조직해야 한다는 과제가 제기된다.
국민의 뜻은 처음부터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개인들이 정치적 공론장에서 대화와 토론을 거쳐 의견을 조정할 때 비로소 다수의 의사가 형성될 수 있다. 문제는 국민 대부분이 유급 또는 무급 노동을 장시간 수행하는 ‘노동하는 주권자’라는 점이다. 과도한 업무와 직장 내 종속, 일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결여는 공론 형성에 참여할 시간과 동력을 약화시킨다.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저서 ‘노동하는 주권자’에서 ‘민주적 노동 정치’의 부활을 제안했다. 사회적 분업에 참여하는 노동은 생계 수단인 동시에 구성원들이 서로를 가치 있는 협력자로 인정하고 연대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반대로 노동 조건이 생계유지와 인정의 경험을 가로막으면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기반도 약해진다는 진단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규제 철폐와 복지 후퇴, 노동 유연화와 저임금 확산은 양극화를 키웠고, 정보통신 기술과 인공지능 도입은 노동의 개별화·프로젝트화·탈물질화·불안정화를 촉진했다. 국내에서도 반도체 성과급과 산업안전 문제가 잠시 부각됐지만 비정규직 증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 플랫폼 노동자 착취, 직장 내 갑질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국민주권정부가 폭넓은 시민의 뜻으로 국정을 운영하려면 노동자의 생계와 사회적 인정을 보장하고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 환경 조성이 선행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