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의 시간을 되감은 SF, 민주주의를 묻다
핵심 요약
《이상한 나라의 불타는 시민들》은 계엄과 탄핵 정국을 다룬 민주주의 장르 단편선이다. 다섯 작품은 AI와 시간여행 등 SF 장치를 통해 시민의 갈등과 정치적 선택의 결과를 그린다. 역사를 되돌리는 상상은 민주주의와 생명을 둘러싼 선택이 취소 가능한 게임이 아니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전혜진을 비롯한 작가들이 참여한 《이상한 나라의 불타는 시민들》은 계엄과 탄핵 정국을 인공지능, 우주함대, 시간여행 등 과학소설의 장치로 풀어낸 단편집이다. 구픽이 펴낸 204쪽 분량의 책으로 가격은 1만4800원이다. ‘민주주의 장르 단편선’을 표방한 다섯 작품은 비상식적인 사건에 휘말린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운지 되묻는 과정을 담았다.
첫 작품 ‘제가 모르는 저의 죄들도’는 대통령과 같은 성씨를 쓰며 계엄으로 경제적 이득까지 얻은 사업가의 고백을 중심에 놓는다. 국회로 달려간 딸과 평화·생명을 강조하는 성당 신부, 계엄에 의문을 품은 공장 직원들 사이에서 그는 같은 가문의 대통령을 자랑스러워했던 마음과 주변의 비판을 마주한다. 자신이 걸어온 삶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긴 사업가는 우연히 시간을 되돌리는 힘을 얻고, 끝내 계엄이 성공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바꾼다.
작품집의 배경에는 계엄과 탄핵 정국이 시민의 일상에 남긴 구체적인 충격이 자리한다. 거리에서의 충돌과 황당한 주장, 정치적 견해가 다른 친구·연인·가족 사이의 다툼이 이어졌고, 짧은 시간 뒤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환율 폭등과 원자재 가격 상승, 정세 불안은 사업 현장으로 번졌다. 체결 직전의 계약이 취소되고 거래처의 지급이 보류됐으며 논의하던 기획도 잇달아 멈추는 등 정치적 선택의 여파가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는 모습이 겹쳐진다.
마지막 단편은 한 사람이 1만 번의 새로고침 끝에 가까스로 지켜낸 평화를 그린다. 지금의 일상은 앞선 9999번의 세계가 불탄 뒤에야 가능해졌다는 설정이다. 시간을 되돌리고 현실을 다시 구성하는 SF적 상상은 잘못된 선택을 시험 삼아 반복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으로 연결된다. 세상의 안전과 생명의 존엄이 걸린 역사는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는 게임이 아니며, 민주주의를 둘러싼 판단에는 되돌리기 어려운 결과가 따른다는 점을 다섯 작품이 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