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굴리는 보이지 않는 결정의 무게
핵심 요약
신간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는 가족의 의사결정과 관리를 맡는 기획 노동을 조명한다. 이 노동은 살림과 육아를 넘어 부부 관계와 간병까지 이어지며 주로 아내와 딸에게 집중된다. 저자는 보이지 않던 노동에 이름을 붙여야 돌봄의 책임을 함께 나눌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신간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는 살림과 육아의 실행에 가려진 ‘기획 노동’을 조명한다. 김희경이 쓰고 웨일북이 펴낸 이 책은 가족에게 필요한 일을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리고, 역할을 배분하며, 진행 상황을 관리하는 정신적 노동이 주로 아내와 엄마에게 집중되는 현실을 21명의 인터뷰를 통해 살핀다.
기획 노동은 설거지나 빨래를 누가 맡을지 정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하루나 일주일을 넘어 가족생활 전반을 계속 점검하고 조율하는 일이다. 아이가 과외 때문에 충분히 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바쁜 일상 속에서 부부의 대화가 끊긴 것은 아닌지 살피는 책임도 여기에 포함된다. 선택 과정에서 피로와 불안이 생기지만, 이런 결정은 아내와 엄마의 사랑으로 포장돼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책은 2년 전 덴마크에서 벌어진 논쟁도 다룬다. 크리스티나 샌더가 여성의 몫으로 굳어진 살림과 돌봄을 조명하고 가사 분담의 해법을 찾는 시리즈를 내놓자, 목사이자 사회비평가인 마리 회그가 반박에 나섰다. 회그는 여성의 정신적 부담이 스스로 세운 높은 기준에서 비롯됐으며 이를 남성의 책임으로 돌린다고 주장했다. 정치인과 시사평론가까지 가세한 논쟁은 성평등지수가 최상위권인 복지국가에서도 돌봄 책임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돌봄의 편중은 간병에서도 드러난다. 부모의 건강이 나빠지면 책임이 딸에게 향하고, 특히 결혼하지 않은 딸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나타난다.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수행되는 일은 헌신과 희생이라는 말로 설명되기 쉽다. 저자는 이름 없이 이어진 노동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책임의 범위와 담당자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가족 구성원이 부담을 함께 나눌 수 있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