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학습용 종이책 확보전, 세계 헌책방 흔든다
핵심 요약
유럽과 호주 헌책방에서 분야를 가리지 않는 대량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앤스로픽은 수백만 권의 중고책을 절단·스캔해 AI 학습 자료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합법 구매 도서의 학습 활용은 공정 이용으로 인정됐지만 실물 기록 훼손과 유통 경로를 둘러싼 우려가 남았다.
아일랜드 골웨이의 케니스 북숍에는 지난 5월 중고책 5000권을 한꺼번에 사겠다는 주문이 접수됐다. 코네마라 지역 전문서와 20여 년 전 정부 저축계좌 안내서처럼 연관성이 희박한 책이 뒤섞였고, 구매자는 할인도 요구하지 않았다. 독일과 호주, 스페인 카탈루냐의 헌책방에서도 오래된 지역서와 실용서까지 쓸어 담는 유사한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주문은 특정 작가나 분야보다 ISBN을 기준으로 미확보 도서를 자동 선별하는 형태를 띠며, 책을 물류 거점에 모은 뒤 미국으로 보내는 사례가 많다. 실제 앤스로픽의 ‘프로젝트 파나마’는 중고책을 대량 구매해 유압식 절단기로 책등을 자르고, 낱장을 산업용 장비로 스캔한 뒤 남은 종이를 재활용 업체에 넘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수천만 달러가 투입돼 수백만 권이 확보됐으며, 외부 계획에는 6개월간 50만∼200만 권을 디지털화하는 목표도 담겼다.
생성형 AI 기업이 종이책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학습 데이터의 품질과 희소성이 있다. 인터넷에는 AI가 만든 저품질 글이 빠르게 늘고 있지만 오래된 책에는 사람이 작성한 문장뿐 아니라 지역사, 전문 지식, 생활문화와 소수 언어 자료가 남아 있다. 경쟁사와 겹치지 않는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가치도 크다. 초기에는 불법 전자책 공유 사이트의 자료가 활용됐고, 앤스로픽 공동 창업자 벤 만이 2021년 LibGen에서 소설과 논픽션을 대량 내려받은 사실도 소송에서 확인됐다.
미 연방법원은 책을 AI 학습에 사용하는 행위와 합법적으로 산 종이책을 파괴해 스캔한 행위를 공정 이용으로 판단했지만, 해적판 전자책 수백만 권을 내려받아 보관한 행위는 달리 봤다. 앤스로픽은 작가·출판사 측과 15억 달러 규모로 합의했고, 약 50만 개 저작물에 책 한 종당 3000달러 수준이 책정됐다. 다만 유럽 헌책방에서 팔린 개별 도서의 최종 구매 기업은 확인되지 않았다. 출판계는 초판·재판의 차이와 메모, 장서인, 서명까지 담긴 실물 기록이 절단과 폐기로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