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골목에 새겨진 대구 여성운동의 두 갈래
핵심 요약
진골목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남일동 여성 7명의 표지석과 벽화가 남아 있다. 패물폐지부인회의 활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근대 여성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정칠성의 활동 유허는 대구에 남아 있지만 현장에는 그와 근우회를 설명하는 안내가 없다.
대구 중구 진골목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발자취가 표지석과 벽화로 남아 있다. 진골목은 조선시대 대구읍성 남문에서 경상감영까지 이어졌던 길로, 경상도에서 ‘긴’을 ‘진’으로 발음한 데서 이름이 비롯됐다. 현재는 건물과 상가가 들어서며 길이가 짧아졌고, 진골목 22번지 표지석에는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진(긴)골목’이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다.
1907년 2월 21일 대구군민대회에서 남성들이 국채를 갚기 위한 금연을 결의하자 남일동 여성 7명은 이틀 뒤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고 패물을 내놓았다. 정경주, 서채봉, 김달준,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 김수원 처 배씨가 참여했으며, 정경주는 단체를 이끌고 취지문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며느리인 정말경·최실경·이덕수도 함께 활동했고, 패물 헌납 움직임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표지석에서 담장을 따라 약 10m 떨어진 곳에는 연단에 선 일곱 여성과 여성 청중을 담은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 벽화가 있다. 이 단체는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출발점이자 전국 최초의 여성운동 조직으로 꼽힌다. 진골목 인근에는 또 다른 대구 출신 여성운동가 정칠성의 흔적도 있다. 1919년 기생 신분으로 종로의 3·1운동을 목격한 그는 이름을 금죽에서 칠성으로 바꾸고 기생 활동과 가야금 교사 제안을 뒤로한 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정칠성은 1922년 일본 유학을 떠났고 이듬해 10월 17일 대구여자청년회를 조직했다.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하고 근우회 창립을 주도한 뒤 전국 지회를 돌며 강연했으며, 1928년 2월 25일 조양회관에서 여성 200여 명이 참석한 근우회 대구지회 창립식에서도 연설했다. 약전골목 교남YMCA 건물과 달성토성 앞 조양회관 터가 관련 유허로 남았지만 정칠성과 근우회를 알리는 내용은 없다. 그는 해방 뒤 좌익 여성운동에 참여하고 1947년 북한으로 갔다가 1950년대 숙청됐으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