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사직단 복원, 재현보다 근거가 먼저다
핵심 요약
지방 사직단 복원이 확산하고 있지만 통일된 옛 규정이 없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조선은 산천 굿을 유교식 제례로 전환하며 전국 읍치에 사직단을 설치했으나 형태와 규모를 표준화하지 못했다. 원래 터와 지역별 변천을 조사하고 오늘날 복원의 목적을 먼저 정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제례가 끊기고 터마저 흩어진 지방 사직단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형태와 규모가 달랐던 제단에 서울 사직단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거나, 빈약한 근거로 수치를 정해 새 시설을 만드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복원에 앞서 원래 위치와 구조를 확인하고 오늘날 사직단이 필요한 이유부터 판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방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유교식 제단이다. 1406년 한양 재천도 직후 예조가 각 지방 설치를 건의하면서 전국 읍치로 확산됐다. 다만 전례에는 성 서쪽에 두고 두 신이 한 단을 함께 쓴다는 정도만 담겼을 뿐 크기와 높이, 시설 구성, 관리 방법에 관한 구체적인 기준은 마련되지 않았다. 남아 있거나 발굴된 유적도 단과 담장, 신실의 형태가 고을마다 제각각이다.
제도의 출발점에는 산천에서 벌어지던 굿을 유교식 제례로 바꾸려는 조선 초기의 정책이 있었다. 왕실과 백성은 질병이나 가뭄·홍수 때 무당을 불러 산천의 신에게 빌었지만, 조정은 이를 부당한 제사로 보면서도 재해가 생길 경우 금지 정책을 탓하는 여론이 일 것을 우려했다. 태종 즉위 무렵 김첨은 백성이 참여할 지방 제단을 세우자는 방안을 냈고, 이후 사찰과 신사를 정리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새 의례를 정착시키는 개혁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지방 사직단 제례가 폐지됐고 부지는 국유지 편입 뒤 민간에 넘어가거나 다른 용도로 쓰였다. 삼척에서는 허목의 중수 기록과 일치하는 발굴 성과가 나왔지만, 원래 터가 1990년대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고 별도 장소에 본모습과 다른 시설이 세워졌다. 문서와 지도, 주민 기억을 통해 원장소를 찾고 발굴이나 표지석 설치, 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기초 조사가 우선돼야 한다. 왕정도 농경사회도 아닌 현재 무엇을 기원하고 어떤 지역의 역사를 담을지에 대한 논의 역시 복원의 전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