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언어에서 사라진 품위와 책임
핵심 요약
과거 대선 현장에서는 격렬한 쟁점도 상대를 모욕하지 않는 언어로 다뤄졌다. 농민들의 달걀 세례를 받은 후보는 무책임한 장담을 피하고 정치인의 감내를 강조했다. 노무현은 승패보다 원칙을 앞세우며 정치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제시했다.
정치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과거 대선 현장에는 품위와 책임, 가치라는 세 가지 기준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치열한 안보 논쟁에서도 상대의 인격을 훼손하지 않았고, 성난 유권자의 항의 앞에서는 정치인이 감당해야 할 몫을 피하지 않았다. 선거의 승패보다 원칙을 앞세운 노무현의 정치관도 이 기준과 맞닿아 있었다.
한 대선 TV 토론에서 판사 출신 보수정당 후보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상대 후보에게 과거 주한미군 철수 주장과 달라진 입장을 따져 물었다. 질문을 받은 후보는 젊은 초선 시절의 생각과 현재의 판단이 달라졌음을 설명하며 당시의 미숙함을 지나치게 꾸짖지 말아 달라고 답했다. 보수 후보는 웃음으로 응수했고, 두 사람은 말을 끊거나 모욕하지 않은 채 한미동맹과 통일관의 차이를 드러냈다.
책임의 태도는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확인됐다. 노동자와 농민의 자식임을 강조했던 대선후보에게 농민들이 달걀을 던졌지만, 그는 개방을 최대한 막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책임질 수 없는 장담은 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달걀을 던진 농민을 비난하기보다 정치하는 사람이 그 정도 항의를 받아야 분노가 누그러지지 않겠느냐며 감내의 책임을 언급했다.
선거에서 패한 경험이 더 많았지만 끝내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원칙을 지킨 승리를 가장 앞에 두고, 그다음으로 원칙 있는 패배를 꼽았다. 가장 나쁜 결과는 원칙조차 지키지 못한 패배라고 규정했다. 이는 정치가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겨루는 데 머무르지 않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과정이라는 인식이었다. 과거의 토론과 유세 현장은 오늘의 정치 언어가 품위와 책임, 가치를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