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끝자락 정릉골, 불 꺼진 골목에 남은 기억
핵심 요약
재개발 이주가 진행 중인 정릉골 골목에서 주민들의 생활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박경리 작가가 머물며 ‘토지’ 1~3권을 집필한 이 마을에는 한때 1200여 가구가 살았다. 기존 마을 자리에는 1411세대 규모 주거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재개발 이주가 본격화된 서울 성북구 정릉골에서 주민들의 생활 흔적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지난 6일 찾은 골목에는 출입금지 안내문과 붉은색 ‘철거’ 표시가 남았고, 주민이 떠난 낮은 집들이 좁은 언덕길을 따라 이어졌다. 정릉시장 주민들은 장을 본 뒤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노인과 손수레를 끌고 오가던 이웃의 모습이 최근 눈에 띄게 줄었다고 입을 모았다.
노란 마을버스 정류소 표지판을 지나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담장을 덮은 넝쿨과 계단 사이로 자란 잡초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집 옆에는 냉장고와 폐가구가 쌓였고 주소판과 낡은 우편함만 제자리를 지켰다. 주민들은 과거 눈이 오면 함께 길을 쓸고 비가 내리면 배수로가 막혔는지 살폈지만, 이제는 밤에도 불이 켜진 집과 사람 말소리를 찾기 어렵다고 했다.
북한산 자락의 정릉골은 1960~1970년대 도심 정비 과정에서 거처를 잃은 사람들이 산비탈에 집을 지으며 형성된 곳이다. 박경리 작가는 1965년부터 1980년 원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이 일대에 살며 소설 ‘토지’ 1~3권을 집필했다. 보국문로29가길 일대의 박경리 가옥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한때 1200여 가구가 모여 살던 마을의 주민과 골목을 기록한 영화 상영회도 지난 7월 열렸다.
정릉골구역은 2003년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된 뒤 2012년 정비구역 지정과 2017년 조합 설립을 거쳤다. 2021년 12월 사업시행인가, 2024년 1월 관리처분인가를 거쳐 이주가 본격화됐으며, 기존 마을 자리에는 1411세대 규모 주거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주민들의 발길이 끊긴 정릉시장 상인들은 자주 찾던 단골의 빈자리를 체감하고 있다. 오랫동안 언덕길을 오르내린 주민들을 태웠던 마을버스 기사에게도 정릉골 운행은 오래 남을 기억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