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다우로스 무대에 오른 전쟁 뒤편의 고통
핵심 요약
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 22명이 에피다우로스에서 전쟁 피해자의 고통을 다룬 ‘트로이의 여인들’을 공연했다. 점자 자료와 촉각 모형, 음성 해설, 자막, 이동 편의 시설을 갖춰 고대극장 최초의 전면 접근성 공연이 마련됐다. 제작진과 관객들은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동등하게 공연을 만들고 관람하는 환경이 상시 기준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오디세이’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가운데, 그리스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들이 전쟁의 이면을 조명했다. 배우 22명이 참여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8월 2일 그리스 남부의 고대 야외 석조극장 에피다우로스에서 공연됐다. 귀환 영웅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이 남긴 고통과 폐허 속 사람들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무대였다.
이번 공연은 2천300년 역사의 고대극장에서 모든 관객을 위한 접근성 서비스를 갖춘 첫 사례로 마련됐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점자 프로그램과 촉각 모형, 실시간 음성 해설이 제공됐고 청각장애인은 무대 위쪽 자막으로 공연을 관람했다. 극장 곳곳에는 이동 편의를 높이기 위한 물리적 보완도 이뤄졌다. 패럴림픽 금메달리스트 그레그 폴리크로니디스는 이날을 평등을 기념한 순간이자 앞으로 이어져야 할 본보기로 평가했다.
작품은 트로이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전사들을 따라간 호메로스와 달리, 약 3세기 뒤 에우리피데스가 바라본 폐허와 여성들의 운명을 다룬다.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추방과 노예화에 놓인 이들의 고통이 중심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58세 배우 에이리니 쿠루바니는 이번에 처음 극장 내부에 들어섰으며, 거대한 공간만큼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한 감정을 드러냈다. 무대에 선 행위 자체도 자주 외면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메시지가 됐다.
시각장애인 심리학자 이오아나마리아 게르추는 안내견 바부와 함께 공연을 관람하며 장애인 역시 동등한 조건에서 문화예술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공연은 그리스 국립극장이 제작했고, 비영리단체 리미널이 알파은행의 재정 지원을 받아 접근성 서비스를 설계했다. 예술감독 아르기로 키오티는 수개월의 기획과 비용, 전문적인 조직 역량이 필요한 복잡한 작업이었다면서도, 이런 방식이 예외가 아니라 주요 무대와 극장이 도달해야 할 기준이 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