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호 논란, 식민지 시대 의사의 선택을 묻다
핵심 요약
안상호의 대정친목회 참여와 식민 통치 선전에 활용된 가족사가 확인됐다. 공식 친일 인명 명단에는 없으며 단체 가입만으로 친일파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나왔다. 김필순·이태준·박서양의 독립운동은 같은 시대 전문직 엘리트에게도 다른 선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배우 하영이 지난 7일 KBS 2TV 예능에서 4대째 의사 집안의 가족사를 소개한 뒤 증조부 안상호의 일제강점기 행적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안상호는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고종을 진료한 근대 의료인인 동시에 친일 성격 단체에 참여한 기록이 확인된 인물이다. 논쟁은 그의 이력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넘어 식민지 체제에서 엘리트가 내린 선택의 책임을 묻는 문제로 확산했다.
안상호는 1902년 도쿄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귀국 후 서울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그러나 1916년 이완용 등이 관여한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영의 소속사도 처음에는 의혹을 부인했지만 해당 기록의 존재를 확인했다. 1918년 매일신보는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그의 가정을 ‘일선동체’의 사례로 다뤘고, 안양의 송덕비는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아카이브에서 친일 시설로 분류됐다.
다만 안상호는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지 않았다. 심용환 소장은 그가 친일 인사들이 다수 참여한 단체에 속했고 가족도 식민 통치 선전에 활용됐다는 점에서 만년의 행적을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하면서도, 구체적인 부역이 확인되지 않은 채 단체 가입만으로 친일파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확정되지 않은 고종 독살설과 그의 행적을 연결하는 시각도 경계했다. 박유하 명예교수는 당시 엘리트가 식민지 체제 안에서 활동한 현실을 ‘구조적 친일’의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대 의사들의 삶은 구조적 제약 속에서도 서로 다른 선택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김필순은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만주에서 독립운동가와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 수입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이태준은 몽골에서 의료 활동을 펼쳐 국왕의 어의로 인정받고 1919년 국가훈장을 받았으며 독립운동 자금도 지원했다. 백정의 아들로 신분의 벽을 넘은 박서양은 만주에 병원을 세워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2008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들의 행적은 식민지의 압박만으로 협력과 저항이라는 개인의 선택을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