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으로 농업 바꾸고 고스톱 만든 우장춘
핵심 요약
우장춘은 배추와 무를 비롯한 다양한 작물을 개량해 한국 농업의 자립 기반을 넓혔다. 연구 원칙과 공사를 중시하며 권력과 관직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지켰다. 후진 양성과 주민을 위한 우물 조성에 힘썼고, 세 명이 즐기는 고스톱도 창안했다.
우장춘 박사는 진도의 자연 조건과 이길성 원예조합장의 협력을 토대로 배추와 무의 우량종 개발을 이끌었다. 속이 차지 않아 재배 과정에서 손으로 묶어야 했던 토종 배추를 개량해 노동력을 줄였고, 생산 시기와 저장성, 맛도 개선했다. 이렇게 보급된 배추는 배추김치의 대중화와 오늘날 김치를 중심으로 한 K푸드 확산의 토대가 됐다.
대관령 시험장에서 만든 무병 씨감자는 강원도 감자의 모태가 됐다. 고추·양파·양배추·오이·토마토·참외도 우량종으로 개선해 농업 자립과 종자 수출의 기반을 넓혔다. 장미·카네이션·국화 품종을 개량하고 코스모스를 철로변과 길가에 심도록 했다. 바둑과 장기, 마작, 화투를 즐긴 그는 코이코이를 응용해 세 명이 하는 고스톱도 창안했다.
연구소 예산은 직원 복지보다 시설 확충에 우선 투입했고, 공사를 엄격히 구분했다. 6·25 전쟁 중 필수 연구원의 입영 연기를 성사시켰지만 같은 연구소에 있던 조카는 필수 인력이 아니라며 입영시켰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수경 재배 딸기의 국내 재배를 묻자 막대한 비용을 이유로 청정 재배 보급이 낫다고 답했다. 농림부 장관 제의도 거절했고, 작업복과 고무신 차림으로 손님을 맞아 ‘고무신 박사’로 불렸다.
후진들에게는 교과서 지식에 머물지 말고 실험과 실패를 거쳐 자기 지식으로 만들라고 가르쳤으며, 잎의 뒷면까지 꿰뚫어 볼 만큼 관찰하라고 강조했다. 1953년 6월 일본에 있는 어머니가 위독했지만 정부가 귀국하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해 출국을 허가하지 않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연구소 강당에 분향소를 차렸고, 모인 조위금으로 식수난을 겪던 주민을 위한 우물을 파 ‘어머니의 젖줄 같은 샘’이라는 뜻의 자유천이라 이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