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빛 달항아리와 말소된 언어의 질문
핵심 요약
글렌 라이곤의 한국 첫 개인전 ‘블랙 문’이 8월 14일 서울에서 개막한다. 숯빛 달항아리와 텍스트 회화 ‘스태틱’, ‘리댁티드’가 함께 전시된다. 작품들은 전통 도자의 문법과 언어의 한계, 검열과 말소의 흔적을 탐색한다.
미국 개념미술가 글렌 라이곤(66)의 국내 첫 개인전 ‘블랙 문’이 8월 14일부터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APMA 캐비닛에서 열린다. 조선백자의 흰빛을 짙은 숯빛으로 바꾼 달항아리 연작과 작가의 대표적인 텍스트 회화 ‘스태틱’, ‘리댁티드’가 한 공간에 놓인다. 전시는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끝내 불투명하게 남는 것의 경계를 살핀다.
검은 달항아리는 라이곤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도예가와 협업해 완성했다. 점토의 종류와 소성 온도를 달리하는 실험을 거쳐 깊은 숯빛을 구현했으며, 표면을 매끈하게 정리하지 않아 일그러진 윤곽과 비대칭적인 몸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자연스러움과 비대칭성을 중시한 조선백자의 미감을 잇는 동시에 전통 도자의 익숙한 색과 형식을 뒤집어 문화적 비평의 매개로 확장했다.
‘스태틱’ 연작은 미국 작가 제임스 볼드윈이 1953년에 쓴 에세이 ‘마을의 이방인’에서 출발한다. 라이곤은 젯소를 바른 화면에 흰색 오일 스틱으로 글을 새기고 다시 검은 안료를 덮었다. 문장은 갈수록 식별하기 어려워지고, 화면은 신호가 끊긴 아날로그 텔레비전의 흑백 모래알처럼 변한다. 복잡한 현실과 문화적 상황을 언어가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지 묻는 구성이다.
‘리댁티드’ 연작에서는 텍스트 위에 ‘X’를 거듭 그어 글자를 직접 지운다. 제도적 검열과 역사적 말소를 상징하는 흔적이 문장을 읽을 수 없게 만드는 한편, 무엇인가 삭제됐다는 사실 자체는 선명하게 남긴다. 지워진 글은 촘촘한 리듬의 추상 이미지로 바뀌며 볼 수 있는 것과 읽고 말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되묻는다. 뉴욕에서 태어나 현지에서 활동해 온 라이곤의 이번 전시는 9월 5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