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덮친 부동산 매입 경쟁, 문화공간도 퇴장
핵심 요약
서촌에서 공공기관을 사칭해 건물주 연락처를 확보하고 매각을 권유하는 부동산 영업이 이어지고 있다. 건물 거래 후 퇴거 요구와 임대료 인상이 발생하면서 장기 영업 상점과 문화공간이 문을 닫았다. 주민과 전문가들은 서촌의 문화자산과 지역 경쟁력을 지킬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부동산 매입 경쟁이 과열되며 상인과 주민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법원이나 한국전력 등 공공기관 관계자인 것처럼 행세하거나 신호등 공사와 수도 교체를 명분으로 건물주 연락처를 요구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연락처를 확보한 일부 중개업자는 높은 매각가와 임대료 수익을 내세워 건물 매각을 집요하게 권유했고, 거래 뒤에는 세입자 퇴거 요구와 임대료 인상이 뒤따랐다.
서촌에서 11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김진실씨는 최근 낯선 사람들이 잇달아 찾아와 건물주 연락처를 물었으며, 거절하면 다른 사람이 다시 방문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건물주에게 월세를 두 배로 받을 수 있다며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도록 권유했다. 20년 경력의 공인중개사 이모씨는 월세가 15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올라 폐업한 갤러리 사례도 확인했다. 공인중개사 최모씨는 강남권 중개법인의 활동이 2~3년 전 시작돼 지난해부터 두드러졌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연락하거나 집까지 찾아가는 일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거주민도 반복적인 매각 압박을 겪었다. 서촌 한옥에서 30년간 살아온 70대 주민은 양복 차림의 젊은 남성이 몇 달 동안 매일 찾아와 집을 팔라고 요구하고, 거절한 뒤에도 수십 통의 우편물을 보내 협박받는 듯한 불안을 느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강 작가의 서점 ‘책방오늘’은 건물을 산 기업의 명도 요구로 지난달 폐점했다. 박노해 시인이 설립한 비영리단체 나눔문화가 14년 동안 운영한 ‘라 카페 갤러리’도 임대료 상승을 감당하지 못하고 지난 3월 영업을 마쳤다.
상인들은 서원과 갤러리, 서점이 어우러진 서촌의 문화자산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책방오늘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뒤 방문객이 몰리며 인근 식당에도 손님을 끌어오던 공간이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예술가가 만든 공간이 지역 가치를 높인 뒤 부동산 자본이 들어와 기존 주민과 상인을 밀어내는 현상이 반복된다고 진단했다. 세계 독자가 찾는 문화공간의 퇴장은 지역의 문화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어 역사와 문화를 품은 장소를 보호할 정책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