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글씨로 이어진 남북 쌍둥이 자매의 그리움
핵심 요약
이만규 선생의 가족은 1948년 이후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쌍둥이 자매는 각각 남북의 한글 서예가가 됐지만 끝내 재회하지 못했다. 두 자매의 붓글씨는 단절된 가족의 소식과 그리움을 잇는 매개가 됐다.
의사에서 교육자로 전향한 이만규 선생의 가족사는 분단으로 갈라졌다. 송도중학교와 배화여자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그는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 통일과 표준어 제정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교육자 서정권을 사위로 택했고, 양가 교육자들의 중매로 혼인이 성사됐다. 그러나 1948년 평양 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귀환길이 막히면서 북에 정착했다.
이만규 선생을 따라 외삼촌 가족과 쌍둥이 딸 이각경도 북으로 향했지만, 다른 쌍둥이 딸은 남편과 상의하겠다며 남았다. 북에서는 이 선생이 애국열사로 대접받은 반면 남쪽 가족은 감시와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정권이 교육감 후보로 나설 때마다 좌절하자 가족은 북에 남은 장인의 이력이 영향을 미쳤다고 여겼다. 분단은 왕래뿐 아니라 남은 가족의 삶에도 무거운 제약을 남겼다.
이 선생은 북으로 간 딸에게 ‘봄뫼’, 남은 딸에게 ‘갈물’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어린 시절 함께 붓을 들었던 자매는 훗날 각각 북과 남을 대표하는 한글 서예가가 됐다. 1970년대 미국에서 돌아온 지인은 북의 언니가 쓴 ‘혈육의 정’을 동생에게 전달했다. 작품은 생존을 확인하는 증표가 됐다. 멕시코 세계여성대회를 계기로 만남을 준비했지만 언니의 불참 통보로 재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노태우 대회 조직위원장은 북의 언니가 오면 자매 합동전시를 열겠다는 뜻을 밝혔다. 동생은 매일 아침 목욕재계하고 새 작품을 썼지만 언니가 오지 못해 전시는 무산됐다. 그는 큰 상심을 겪은 뒤 1989년 세상을 떠났다. 2001년 남북 이산가족 교환방문 행사에서는 북한 참가자를 통해 외삼촌 소식이 짧게 전해졌다. 편지와 사진조차 자유롭게 나누지 못한 세월에도 자매는 붓을 놓지 않았고, 두 사람의 글씨는 만나지 못한 혈육의 정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