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삶 비껴간 조선 당파 정치의 민낯
핵심 요약
두 차례 예송은 왕실 상복 기간을 둘러싼 논쟁에서 당파의 권력 교체로 번졌다. 숙종 대에는 경신대출척과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며 남인과 서인이 번갈아 집권했다.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린 백성의 삶을 외면한 정쟁은 오늘날 정치에도 경고를 남긴다.
효종이 1659년 숨진 뒤 장렬왕후의 상복 기간을 둘러싼 기해예송이 벌어졌다. 쟁점은 효종을 인조의 맏아들로 볼지 둘째 아들로 볼지였다. 남인은 만 2년, 서인은 1년을 주장했고 서인이 승리하면서 남인은 정계 중심에서 밀려났다. 효종은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있다가 1645년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숨진 소현세자 대신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이었다.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을 놓고 갑인예송이 다시 일어났다. 남인은 1년, 서인은 9개월을 내세웠으며 효종의 아들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후 남인은 서인을 밀어내고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다. 두 차례 예송은 왕실의 예법을 다룬 논쟁이었지만, 상복 기간을 정하는 결과가 곧 당파의 권력 교체로 이어졌다.
정국의 주도권은 숙종 때에도 거듭 뒤집혔다. 숙종은 1680년 영의정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를 기념하는 잔치에 왕실의 기름칠한 천막을 허락 없이 사용하자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을 등용했다. 1689년에는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 데 반대한 서인을 축출해 남인을 불러들였고, 1694년 폐비 민씨를 정비로 복귀시키면서 다시 남인을 내보내고 서인을 기용했다.
권력 다툼이 이어지는 동안 백성은 대기근과 전염병에 노출됐다. 1670~1671년 경신대기근으로 140만명 안팎이 숨졌고, 1695~1696년 을병대기근 때도 인구가 약 140만명 감소했다.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비교적 큰 기근은 52차례 발생했으며, 17·18세기에는 발진티푸스와 천연두, 홍역, 장티푸스, 이질 등이 평균 2년에 한 번 이상 동시에 번졌다. 오늘날 정치 역시 당파 간 공방을 넘어 국민의 복리와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