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물로 되짚은 근대 문명과 방역의 이면
핵심 요약
워릭 앤더슨은 배설물을 밀어내면서도 분석해 온 인류의 양가적 태도를 추적했다. 배설물 관리는 서구 이론과 식민지 위생 통치의 핵심 수단으로 작동했다. 코로나19 이후 확산한 하수 역학은 배설물이 현대 방역 체계에 다시 편입된 사례로 제시됐다.
의학사·인류학자인 워릭 앤더슨 시드니대학교 교수가 저서 ‘배설 스펙터클’을 통해 인류가 배설물을 밀어내면서도 끊임없이 분석하고 기록해 온 역사를 조명했다. 그는 혐오와 호기심이 공존하는 태도 속에서 근대인의 정체성과 통제 욕망을 읽어낸다. 코로나19 대유행 뒤 확산한 하수 역학도 배설물이 다시 공중보건과 생물 안보의 핵심 징표로 편입된 사례로 다뤘다.
책은 프로이트의 항문기 개념에서 출발해 1960년대 메리 더글러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논의까지 살핀다. 더글러스는 제자리를 벗어난 물질이 일으키는 불안과 상징적 통제에 주목했고, 크리스테바는 배설물을 외부에서 밀려오는 정체성의 위협으로 해석했다. 앤더슨은 서구의 이론가와 의과학자가 배설물을 감시하고 분류하는 역할을 자임해 온 과정도 비판적으로 되짚었다.
배설물 관리는 제국의 식민 통치와도 맞물렸다. 20세기 초 미국 보건당국은 인간의 배설물을 비소나 스트리크닌보다 위험한 것으로 규정하며 필리핀 주민을 통제 대상으로 바라봤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위생경찰이 전염병을 감시하고 배변과 분뇨를 관리했다. 1918년 ‘구례유씨가일기’에는 측간 개량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경고가 기록돼 있다. 미국과 록펠러재단은 식민지와 빈곤 지역, 저개발 국가에 수백만 개의 변소를 설치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하수에서 바이러스의 흔적을 찾는 감시 체계가 빠르게 확대됐다. 한국도 2023년부터 전국 64개 하수처리장에서 코로나19와 노로바이러스, 인플루엔자 등을 감시하기 시작했으며, 전수 감시가 표본 감시로 바뀐 뒤에도 조기 경보를 위한 하수 모니터링을 병행하고 있다. 앤더슨은 이 방식의 공중보건상 효용이 보완적 수준인 데 비해 상징적 매력이 과도하게 커졌다고 지적하며, 배설물을 둘러싼 문명의 집착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