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 후기작,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빈자리 채우나
핵심 요약
박래현의 후기 작품이 한국 페미니즘 미술 1세대의 성과로 재평가되고 있다. 태피스트리와 판화, 유기적 추상에는 여성의 신체·생명·창조를 환기하는 이미지가 나타난다. 그의 작업은 1960~1970년대 서구 초기 페미니즘 미술과의 동시성을 보여준다.
박래현의 후기 작업을 한국 페미니즘 미술 1세대의 성과로 다시 살펴야 한다는 미술사적 평가가 제기된다. 여성의 전통적 영역이던 태피스트리를 순수미술로 끌어들이고, 추상화와 판화에 여성의 신체와 생명을 환기하는 이미지를 구현한 그의 작품은 1960~1970년대 미국·유럽에서 태동한 초기 페미니즘 미술과 뚜렷한 공통점을 보인다.
박래현은 경성여자사범학교와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한 뒤 1956년 국전과 대한미술협회전에서 잇달아 대통령상을 받았다. 한국YWCA에서 김활란·박에스더 등과 관계를 맺고 모윤숙을 비롯한 여성 문인들과 교류했으며, 1964년 미국 국무부 초청 순회전시 이후 미국 외교관 부인과 미 문화원 소속 여성들과도 접점을 넓혔다. 여성지 기고문에서는 가부장적 종속에 대한 자각과 여성 주체성 확립을 강조했다.
1960년대 후반 그의 추상화는 안료가 번지며 색이 겹치는 효과를 통해 유기적 조직과 생성의 감각을 드러냈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 뒤 중남미와 미국을 여행했고, 1969년 미국 유학을 계기로 태피스트리와 판화로 작업 영역을 확장했다. 판화에는 여성의 성기와 자궁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이 등장했으며, 작품 제목에도 ‘태고’, ‘근원’, ‘잉태’, ‘생’, ‘생명’, ‘창조’처럼 원초적 여성성과 연결되는 언어가 반복됐다.
초기 페미니즘 미술은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 맞서 출산·자궁·월경 등 여성의 신체 경험을 가시화하고 태피스트리와 퀼트를 예술의 영역으로 옮겼다. 박래현이 당시 서구 작가들과 직접 교류하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는 없지만, 그의 사회적 위치와 후기 작품의 주제·재료는 이 흐름과 시기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 작업을 페미니즘 미술 1세대로 분류하면 한국미술사의 누락을 보완하는 동시에 서구 미술과의 동시성도 구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