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고개에 깃든 6·25 납북자들의 한과 그리움
핵심 요약
6·25전쟁 당시 인민군은 미아리 고개를 통해 민간인 9만5000여 명을 강제 납북했다. 납북자 대부분은 청년 남성으로, 북한에서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 유엔군의 교환 제안에도 북한이 거부해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으며, 가족들의 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후퇴할 때마다 거쳐야 했던 미아리 고개는 민간인 납북의 현장이었다. 1956년 발표된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이곳에서 가족과 생이별한 이들의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을 노래했다. 대한민국 통계연감(1954년)에 따르면 전쟁 중 납북된 민간인은 8만3000여 명에 달하며, '6·25 전쟁 납북 피해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는 전시 납북자를 9만5456명으로 추산했다.
납북자 중 98.2%가 남성이고 85%가 10대 후반에서 35세 사이의 청년이었다. 인민군은 서울 점령 직후 백인제 박사 등 유력 인사를 체포했고, 백 박사는 동생과 함께 북으로 끌려갔다. 그의 부인 최경진 여사는 1955년 기자에게 “아직도 남편이 외국 출장 간 것만 같다”며 귀환을 믿는다고 말했다. 당시 국민학교 2학년이던 딸의 산수 시험 답안지가 책상에 놓여 있었고, 둘째 아들은 “내 손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했다.
김일성은 1946년 “부족한 인테리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교시했고, 1949년 북한 연천주재기관 보고서에는 “남한의 반공산주의 집단을 북으로 데려와 분열·파괴시킨다”는 기록이 있다. 납북자들은 철사줄에 묶인 채 맨발로 미아리 고개를 넘었고, 가족들은 통곡하며 지켜봐야 했다. 당시 28세였던 김용일 씨는 “쇠고랑을 채우고 20여 일을 이동하니 굳은살이 배겼다”고 증언했고, 서울대 간호대 2학년이었던 박명자 씨는 “지친 사람은 밖으로 나오라고 해 처형됐다”고 말했다.
유엔군은 휴전회담에서 납북 민간인 문제를 제기했지만 북한은 자진 월북이라 주장하며 교환을 거부했다. 결국 납북자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고, 유엔인권위 2014년 보고서는 이들이 북한에서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고 밝혔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운영하는 사이버 기념관(www.돌아오지못한사람들.kr)에는 지금도 가족들의 사연이 이어지고 있다. 네 살 때 아버지와 헤어진 최영재 씨는 2017년 “아버지 연세는 아직도 마흔이시니 뒤바뀐 부자간의 나이가 슬프다”고 적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