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킷, 고요한 일상에 새긴 상실과 분노
핵심 요약
리킷이 7년 만의 한국 개인전에서 회화·영상·설치·사운드를 결합한 공간을 선보인다. 자연광과 창밖 풍경, 히로시마의 꽃, 닐 영의 노래가 상실과 슬픔의 정서를 이룬다. 홍콩의 격동을 지나온 작가는 정치적 구호 대신 일상의 이미지로 무력감과 분노를 드러낸다.
홍콩 출신 작가 리킷의 개인전 ‘리킷: 곧 흘러가 버릴 날들을 천천히 곱씹으며’가 서울 서초구 스페이스 이수에서 10월 30일까지 열린다. 7년 만의 한국 개인전으로, 설치·회화·영상·사운드 작품 9점을 한 공간에 엮었다. 작가는 개별 작품뿐 아니라 자연광과 창밖 풍경, 전시장에 흐르는 음악까지 전시를 이루는 하나의 작업으로 제시한다.
유리창에 칠한 아크릴 물감은 외부의 빛을 부드럽게 들이고, 불투명한 창 너머 풍경까지 작품 안으로 끌어온다. 스테인리스 스틸 판에 산업용 스프레이 페인트를 사용한 신작 회화는 금속의 광택과 반사광으로 푸른 하늘과 노을을 떠올리게 한다. 그 위에 손으로 그린 얼굴과 ‘포르노’ 같은 단어가 놓여 잔잔한 화면에 긴장을 더한다. 리킷은 하늘을 볼 때처럼 관람객이 작품 앞에서 각자의 생각을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영상에는 리킷이 히로시마를 걸으며 만난 꽃과 직접 쓴 일기 형식의 자막이 담겼다. 서울 전시를 위해 고른 닐 영의 ‘온리 러브 캔 브레이크 유어 하트’를 샘플링한 음악은 저물어가는 꽃 장면과 겹쳐 사랑이 남기는 아픔을 환기한다. 그는 한국에서 느낀 구슬픔과 인내의 정서,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 맞닿은 감정이 이 노래와 닮았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 손으로 격자와 줄무늬를 그린 천 작업 ‘핸드 페인티드 클로드’로 알려진 리킷은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홍콩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다. 그의 천은 2004년 홍콩 민주화 시위에서 깃발과 현수막으로 쓰였다. 14년째 대만에 사는 그는 2020년 이후 정치적 이유로 홍콩에 돌아가지 못했지만 정치를 직접 다루는 작가가 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대신 2014년 우산혁명과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를 지나며 겪은 무력감과 상실, 침묵을 일상의 이미지에 담았다. 과거의 분노를 이제는 주머니 속 작은 돌처럼 간직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광장 가장자리에 조용히 선 사람의 슬픔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