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 성적표 밖에서 찾은 골키퍼의 재능
핵심 요약
서유석은 전교 480명 중 최하위였지만 핸드볼 대표 선발 시험에서는 전국 추천 선수 40명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축구 골키퍼로 운동을 시작한 그는 축구부가 없는 중학교에 진학한 뒤 핸드볼 골키퍼로 재능을 키웠다. 아버지의 반대로 일본 원정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좌절 뒤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태도를 배웠다.
서유석은 서울고 2학년 때 일본 고교 선발팀과의 교환 경기에 출전할 한국 대표선수 선발 시험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전국 각 도협회의 추천을 받은 40명이 일주일간 합숙하며 달리기와 공 던지기 등을 겨뤘고, 최종 15명 안에 들었다. 전교생 480명 가운데 성적이 가장 낮았던 그는 운동장에서 자신의 재능이 등수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운동과의 인연은 창천국민학교 시절 축구로 시작됐다. 집 근처 연세대 운동장에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며 골대 뒤로 흐른 공을 주웠고, 낡은 가죽공을 얻으면 동네 친구들과 해 질 때까지 축구를 했다. 5학년 때 북성국민학교를 상대로 첫 정식 경기에 골키퍼로 출전했으며, 상대 골문은 훗날 국가대표가 된 이세연이 지켰다. 이후 축구부가 없는 서울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공을 계속 잡기 위해 핸드볼부를 찾았다.
핸드볼에서도 자리는 골키퍼였다. 축구보다 공이 작고 골문의 형태도 달랐지만, 공을 끝까지 주시하며 몸으로 막아내는 역할은 같았다. 축구장에서 익힌 순발력과 몸을 던지는 배짱은 새로운 종목에서도 강점이 됐다. 책상 앞에서는 집중하기 어려웠던 그가 골문 앞에서는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고, 학업 성적으로 상했던 자존감도 운동을 통해 서서히 회복했다. 당시 사회는 4·19혁명 이후 불과 1년여 만에 5·16군사정변을 겪으며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표 선발의 기쁨은 일본 원정 불발로 이어졌다. 당시 서울고 교장이던 아버지는 교장 아들이 학교를 비우고 해외 경기에 나간 전례가 없다며 참가를 허락하지 않았고, 교사들의 설득에도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서유석은 선발시험 1위와 대표 자격을 얻고도 태극마크를 달고 원정 골문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실점 뒤에도 다음 공을 막기 위해 다시 자리를 잡는 골키퍼처럼 좌절 후 제자리로 돌아오는 태도를 배웠다. 훗날 그는 믿음을 뒤처지고 좌절한 순간에도 삶의 자리를 지키는 힘으로 이해했고, 사람의 가치는 등수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