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학자가 풀어낸 장수왕 천도의 비밀, 한국사 다시 읽기
핵심 요약
지리학자 박정재가 기후 데이터로 한국사를 재해석한 <기후로 보는 한국사>를 펴냈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를 기후변화로 설명하고, 기후가 전쟁과 평화, 국가 흥망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저자는 기후 위기 시대에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어선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를 두고 그동안 여러 학설이 제기됐지만, 지리학자 박정재는 기후변화에서 그 답을 찾았다. 저자는 저서 <기후로 보는 한국사>에서 420~430년경 강수량 감소와 기온 하락이 이어지자 추운 국내성 일대의 농업 생산성이 떨어졌고,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따뜻한 평양으로 천도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는 <삼국사기>에 천도 이유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점을 기후 데이터로 보완한 해석이다.
저자는 생물지리학, 고생태학, 고기후학을 연구하는 지리학자로, 동굴 석순, 습지 꽃가루, 나무 나이테 등에서 과거 기후를 복원해 역사 기록과 대조했다. 그는 장수왕 천도 시기 유럽에서 훈족, 고트족, 반달족 등 유목민의 대이동이 일어난 점을 들어 기후변화가 북반구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또한 위만이 고조선에서 권력을 잡은 배경에도 풍요로운 날씨로 서쪽 변방 시장이 번성한 사실이 자리한다고 설명한다.
책은 기후가 안정적이면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고, 혹독한 기후와 기근이 이어지면 민란과 내란이 장기화한다는 패턴을 제시한다. 17세기 전 세계적 기근 속에서 30년 전쟁, 병자호란, 정묘호란이 발생했고, 기온이 높았던 18세기에는 전쟁이 줄었다. 반면 정조 치세는 세계적 대기근과 겹쳤지만 제도 정비로 위기를 넘겼고, 순조 재위 기간에는 홍경래의 난 등으로 국력이 하락했다. 저자는 기후만이 역사의 동인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현대의 기후 위기, 자원 고갈, 생태계 붕괴 같은 문제는 역사학만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며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어선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헬 지대의 분쟁과 시리아 내전이 가뭄과 사막화와 관련된 점을 언급하며, 과거에는 기온 하락이 충돌을 부추겼다면 앞으로는 기온 상승이 갈등을 촉발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책은 기후변화라는 새로운 렌즈로 한국사의 흐름을 재해석한 시도로, 일부 비약이나 단순화의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학제 간 연구의 필요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