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서울대회로 이어진 미국 부흥운동
핵심 요약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서울전도대회에 닷새간 약 320만명이 참석했다. 그레이엄의 대중 전도는 조지 휫필드에서 이어진 미국 부흥운동 전통을 계승했다. 서울대회는 한국교회의 대형집회 열정과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1973년 서울에서 개최한 닷새간의 전도대회에는 약 320만명이 참석했다. 그의 전도대회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인 집회로 알려진 이 행사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선교 확대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했고, 대규모 집회를 교회 성장과 위기 극복의 계기로 바라보는 흐름에도 힘을 실었다.
그레이엄은 191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휘튼칼리지를 졸업했으며, 1949년 로스앤젤레스 전도집회를 계기로 널리 알려졌다. 1950년부터 라디오 프로그램 ‘결정의 시간’을 진행하며 반공주의와 복음주의를 결합했고, 백악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 이후에는 정치권과의 협력에 신중한 태도를 취했으며, 1980년대에는 핵무기 증강에 반대하고 북한·중국·옛 소련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레이엄의 대중 전도 방식은 18세기 조지 휫필드에서 시작된 미국 부흥운동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휫필드는 집회 수개월 전부터 신문 광고를 활용하고 설교에 극적 요소를 도입해 순회 집회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D L 무디와 빌리 선데이, 윌리엄 시모어 등이 흐름을 이었고, 1920년대에는 에이미 셈플 맥퍼슨이 대형 예배당과 연극적 연출을 활용해 복음을 전달했다.
20세기 중반 등장한 신복음주의는 전투적 근본주의와 거리를 두고 휘튼칼리지, 풀러신학교, 고든 칼리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등을 중심으로 기반을 넓혔다. 그레이엄은 폭넓은 기독교 단체와 협력하며 이 진영의 대표 인물로 부상했다. 1952년과 1956년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을 찾은 1973년 서울대회는 미국 부흥운동의 대중 집회 전통을 한국교회에 각인시켰고, 교회 지도자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둘러싼 기대도 함께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