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기념식 총탄에 쓰러진 육영수 여사
핵심 요약
육영수 여사는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노린 총탄에 맞아 숨졌다. 그는 민원을 직접 살피고 한센인들의 손을 잡는 등 소외계층을 돌보며 대중적 신망을 얻었다. 총격 사건은 반공 정서와 한일 갈등을 키웠고, 그의 죽음 뒤 박정희 정권의 억압은 더욱 심해졌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도중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한 총격이 발생했다. 재일교포 문세광이 객석에서 단상으로 접근하며 쏜 총탄은 박 대통령 대신 오른쪽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를 맞혔다. 전국에 생중계된 가운데 쓰러진 육 여사는 몇 시간 뒤 숨졌다. 향년 48세였다.
문세광은 처음 발사 과정에서 자신의 허벅지를 다친 뒤 통로를 따라 단상 쪽으로 달려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은 연단에 맞았고, 이어진 총탄이 육 여사를 쓰러뜨렸다. 혼란 속에서 고교 합창단원 장봉화 양도 경호원의 총에 맞아 숨졌지만, 당시 공식 발표는 문세광의 범행으로 돌렸다. 위조 여권으로 입국한 문세광은 일본 경찰서에서 훔친 권총을 사용했으며, 친북 단체 조총련과 연계돼 있었다.
1925년 충북 옥천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육 여사는 이화여고 진학을 위해 서울로 왔다. 한국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당시 기혼 군인이던 박정희를 만났고,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950년 12월 12일 결혼했다. 1961년 군사정변 이후에는 교수들의 비공개 강의를 듣고 민원을 직접 살폈다. 1971년에는 전남 나주의 한센인 마을을 찾아 장갑 없이 환자들의 손을 잡는 등 소외된 이들과 접촉했다.
박정희 정권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반대 인사를 투옥한 가운데서도 육 여사는 청와대 안에서 남편을 제어하는 인물로 인식됐다. 장례 행렬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몰렸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사건 뒤 반공 정서는 더 강해지고 한일 관계도 급속히 냉각됐으나,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의 유감·조의 서한으로 수습 국면에 들어갔다. 이후 박 정권의 억압은 심화됐고 박 대통령은 1979년 김재규에게 피살됐다. 장녀 박근혜는 훗날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됐지만 탄핵됐고, 육 여사에 대한 긍정적 기억은 가족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과 달리 상당 부분 유지됐다.